렌트는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했다. 장황히 말하자면 한국에서 제작한 렌트를 볼 때마다 만족도가 낮았기 때문에 더 이상 국내에서 렌트는 안보겠다고 결심한 것.
그런데 올해 올라오는 렌트에서 김지우씨가 미미를 맡는다는 소식을 듣고선 그 결심이 흔들렸다. 뮤지컬 금발이너무해에서 밝은 이미지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김지우씨가 완전 다른 이미지의 미미를 어떻게 연기 할지 너무나 궁금했던 것. 같은 역에 함께 캐스팅 된 윤공주씨에겐 미미 역을 무척 잘 소화하리란 기대가 있었다면 김지우씨는 미미를 어떻게 연기 할지 궁금함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김지우씨 공연 날을 골라 충무아트홀에 렌트를 보러 갔다.

2009년 이후 2년 만에 본 국내 렌트는 ‘지금 당장 사랑을’이란 주 메시지를 전하기엔 여전히 부족했다. 여전히 나에겐 어려운 공연.
렌트는 죽음의 공포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 작품 같다. 죽음의 공포를 느껴 본 관객이 얼마나 있겠나? 그 공포를 대리 체험하게 만드는 것은 연출과 배우들의 몫이다. 관객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죽음을 앞둔 자들의 공포를 느끼고,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느끼는 작은 사랑의 소중한 가치를 공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렌트는 그런 체험을 하게 해주지 못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본 브로드웨이 투어 공연 빼곤. 그러니 사건의 개연성도 떨어져 보이고 인물들은 조울증에 걸린 것처럼 느껴지지.
마크, 로저, 미미란 표면적 남자주인공, 여자주인공이 있지만 이 작품의 사실상 주인공은 앤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공연에선 앤젤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공연 전체의 만족도가 하락했다. 원래 제일 마지막 씬에 죽었던 앤젤이 달려와 무대 위의 배우들 중앙에 자리잡으면 와!!!! 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데, 그럴 생각 하나도 안들었다는 -_-;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좋아하는 김지우씨의 미미가 있었다는 것.
이 공연을 보게 만든 김지우씨는 극중 19살인 미미 이미지에 꽤 어울렸다. 노래도 괜찮은 편. 다만 예상했던 대로 춤과 노래를 함께 소화해야 하는 Out Tonight에선 춤도 노래도 많이 아쉬웠다. 김지우씨 공연을 몇 번 보면서 느낀 단점이 있는데 예상 외(?)로 춤이 안된다는 것. 조금 뻣뻣한 편 ^^. 특히 한 위치에서 춤 추다가 동선을 따라 다른 위치로 옮겨 갈 때 성큼성큼 움직이는 모습이 굉장히 어색한데 이번 공연에서도 그대로 나왔다. 너무 관심을 가지고 봐서 단점이 두드려져 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앞의 Light My Candle은 좀 더 끈적하게 했었으면 더 좋았을 뻔. 사실 이 씬은 로저랑 합이 잘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TV 연기 경험이 있는 배우답게 디테일한 감정 연기는 김지우씨의 강점. 2막 시작 부분의 밝은 역에도 잘 어울렸지만 뒷부분의 아픈 연기가 좋았다.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김지우씨 팬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미미에게 바치는 로저의 Your eyes에 감동했다. 여태까진 이 넘버가 좋았던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노래를 찾겠다고 노래를 부르다가 기껏 작곡한 게 그 정도 노래냐란 생각을 했으면 했었지 ㅎㅎ. 김지우씨가 부르는 Without you도 참 좋았는데 이 역시 김지우씨의 연기 덕인지, 팬심 덕인지, 아니면 조금 고쳐 쓴 것 같은 가사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시 공연 전반에 대한 얘기로 돌아오자면, 극 중 커플 관계에서 사랑의 화학 작용(chemistry)을 전혀 느끼기 어려웠다. 로저와 미미, 엔젤과 콜린, 모린과 조앤 커플 모두. 2009년 공연에서는 잘 드러났던 엔젤과 콜린의 애틋한 관계가 눈에 띄지 않는 건 특히 아쉽다.
하여튼 렌트는 국내 프로덕션에서는 표현하기가 힘든 뭔가가 있는 작품이다. 원어의 재치있는 노래 가사들도 번안하기 힘들며, 이번 공연의 경우 앙상블들의 얼굴과 의상 모두 극과 안 어울린다. 음악 자체는 좋지만 공연은 그에 못 미친다: Take me or leave me 정도가 매번 베스트 넘버이고 그 외의 곡들은 별 감흥이 안 생긴다. 곡을 잘 아는 데도 이런 느낌 받는 건 거의 없는 편인데. 그래도 이번엔 지우 미미 덕에 Without you와 Your eyes는 건졌다.
김지우씨를 제외한 배우들에 대한 감상. 가장 잘 한 배우는 조앤 역의 김경선씨. 원래 잘 하시는 분이라 특별히 렌트에서 더 잘한 느낌은 아니지만 ㅋ.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콜린 역의 이든씨. 2009년 렌트에서 최재림씨를 발견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배우인데 목소리가 좋고, 키 크고 머리 작아 비주얼도 좋다. 약간 건들건들 거리는 것도 재미있고, 공연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진짜 산타페 가서 살아도 즐겁게 살 사람 같다 ㅋㅋ. 모린을 연기한 조진아씨, 오랜만. 베니역의 서승원씨는 내가 지금까지 본 국내 베니 중 최고. 사실 지금까지 베니들을 보며 뭘 기준으로 저 역을 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공연 퀄리티 하락의 주요인이었음.

지금까지 충무아트홀의 음향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이번엔 영 별로. 앞쪽으론 처음 앉아봐서 그런지, 아니면 이 공연 자체의 음향 세팅이 문제가 있는건지. 워낙 깨알 같은 대사들이 많은 렌트라 더 안 좋게 느껴진 건지 모르겠다. 1열은 좌우로 무대를 넓게 쓰는 경우 공연 관람이 좀 힘들었다. La Vie Boheme에선 완전 시선 분산. 오죽했으면 모린의 ‘엉덩이를 까고’ 장면을 놓쳤을까 -_-;;.
내가 박칼린 감독의 연출작을 세 갠가 본 것 같은데 (2008년 라스트파이브이어스, 퀴즈쇼 초연, 이번 렌트. 또 더 있나?) 모두 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것. 하긴 다른 사람들이 연출한 같은 작품들을 봤을 때도 딱히 내 취향인 적은 없으니 박칼린 감독의 연출이 나한테 안 맞는 건 아니고 작품이 내 스타일이 아닌 걸 수도.
그래도 Seasons of Love를 합창하는 커튼콜은 언제나 좋다. 내가 실제로 무대에서도 불러 봐서 따라 부를 수 있는 곡.
커튼콜 촬영은 허용 된다.
2011-09-09 금 오후 8시 00분
충무아트홀 대극장 1층 1열 15번
R석 충무아트홀 무료회원 할인 10% 6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