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스트파이브이어스 The Last 5 Years의 국내 03년 초연, 08년 재연, 그리고 지금 공연 중인 작품을 다 봤는데 이번 공연에서야 이 작품을 완전히 즐겼단 생각이 든다.
뮤지컬 라스트파이브이어스의 오리지널 캐스트 음반은 아마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뮤지컬 음반일 것이다. 또한 너무나도 좋아하는 음반이기도 하다. 몇몇 곡들은 도입부만 들어도 눈가가 촉촉해지고, 몇몇 곡들은 듣고 있으면 막 흥이 난다. 이렇게 좋아하는 넘버들이 담긴 공연이지만 지금까지의 03년, 08년 국내 공연은 모두 내 기대에 못 미쳤다. 그런데 드디어 이번에 내가 기대했던 라스트파이브이어스를 만난 것이다.
몇년 전에 본 영화의 덕일 수도 있겠다. 극을 좀 더 친절하게 묘사한 영화를 보며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을 수 있기 때문. 어쨌든 이번 공연은 참 좋았다. 얼마 전에 본 뮤지컬 드라큘라도 너무 좋았는데 이 공연은 또 다른 의미로 너무 좋았다. 이 공연은 제이미와 캐시, 단 두 사람이 등장하는 공연이다. 제이미의 시간은 둘의 첫 만남에서 이별까지의 정방향으로 흐르고 캐시의 시간은 역방향으로 흐른다. 그래서 제이미는 밝게 시작해서 어두워지고, 캐시는 어둡게 시작하여 밝아진다. 두 시간대가 크로스 되는 프로포즈 씬의 넘버1만 두 배우가 같이 부르고 나머지 곡들은 본인의 시간대에서 혼자 부른다2. 그래서 2인극이라기보다는 1인극 원플러스원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예전에 봤을 땐 이 이상한 시간 배치가 스토리 공감에 방해가 됐지만 이번에는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또, 이런 식으로 감정의 진폭을 크게 만들어 극락과 지옥 사이에서 줄을 타는 연애와 결혼생활을 더 잘 표현하려고 한 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
박지연 배우를 보러 간 공연이지만 이충주 배우에 더 감탄했다. 이충주 배우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3 공연은 처음 봤다. 이충주 배우는 내가 익숙한 오리지널 공연 음반과 톤이 비슷하고 노래 스타일도 비슷했다. 그게 너무 좋았다. 진짜 너무 잘한다. 중간 중간에 보여준 깜찍함은 보너스. 테이블을 여러 번 넘어 다녀 다칠까봐 걱정이 될 정도로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이룬 제이미 그자체였다. 당당하고 밝은 제이미부터 If I didn’t believe in you로 절규하는 힘겨운 제이미까지 완벽했다.
그리고 나를 이 공연으로 이끈 박지연 배우,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좌측 소파에 혼자 앉아 첫 곡인 Still Hurting을 부르는데 OP2열에 앉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부르는 느낌을 받았다. 붉은 눈시울로 나를 바라보며 기분이 내려앉는 곡을 불러주시는데 어찌 공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리. 소극장의 매력이란. 그런데 이후 넘버들을 부를 때 곡마다 발성이 왔다 갔다 하고 질러야 할때 못 지르는 부분이 여러 번 나왔다.. ‘어… 이런 배우가 아닌데 왜 이러지…’ 라고 생각할 정도. 공연 끝나고 후기를 보니 박지연 배우가 감긴가에 걸려 제 컨디션이 아닌 것 같다는 글이 있더라. 이번 공연의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연기가 워낙 좋아 큰 결점은 아니었다. 평범하게 살기 싫은, 꿈이 있고 자신감 뿜뿜이었던 미혼 시절, 거듭되는 실패에 자존감이 떨어진 시점, 이별 통보를 받는 5년 후의 순간까지 너무 잘 표현해주셨다.
과거의 이혜경-성기윤, 양준모-김아선 커플과 비교했을 때 오늘 본 박지연-이충주 커플이 가장 마음에 든다. 둘이 처음이자 유일하게 바라보는 프로포즈 씬에서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4. 각자 노래를 부를 때도 파트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상당히 귀여운 커플이기도 했다..
이 공연을 볼 때마다 사랑은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두 인물의 시간 흐름을 반대로 배치함으로써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둘의 어긋남이 눈에 보여 더 슬프다. 배우들은 이 이상한 시간 흐름 안에서 감정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참 어려웠을 것 같다. 배우 단 둘이 책임지고 이끄는 sung through 공연이라 에너지 소모가 상당할 것 없다. 인터미션 없이 1시간 반 안에 끝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연출5도 좋았다. 소극장인데 회전무대를 쓴 과감함도 좋았다. 무대 크기에 비해 오버스펙인 것 같지만 역으로 흐르는 시간 과 어긋나는 둘의 감정을 표현하기 적합하단 생각을 했다.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편지로 시작해 그 편지로 끝나는 연출도 좋다. 별 것 없는(?) 의상도 마음에 확 들었다. 무대 뒤에 라이트를 설치해 장면의 시점을 표현하려 한 것 같은데 봐도 잘 모르겠고 본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이건 없어도 될 것 같았다. 까다로운 시간의 흐름을 모르는 관객들이 있을까봐 공연 시작 전 방송으로 안내를 하는 등, 신경을 썼다.
가슴을 건드리는 좋은 공연이었다. 다른 배우들도 잘 하시겠지만 박지연 배우 컨디션 돌아오면 이 두 배우로 다시 보고 싶다.
2024년 01월 27일 (토) 오후 6시 00분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OP열 21번번
조기예매 10%할인 72,000원
Creative Team
- 작사/작곡: Jason Robert Brown
- 번역: 김수빈
- 한국말가사: 김수빈, 양주인, 이지영
- 연출: 이지영
- 음악감동: 양주인
- 안무: 문병권
- 무대/소품디자인: 최영은
- 음향디자인: 김기영
- 조명디자인: 임재덕
- 분장디자인: 김유선
- 의상디자인: 천유경
PS: 이번 공연은 우연한 기회에 예매하게 됐다.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지인 외에 유일하게 팔로우 하는 사람이 박지연 배우. 오래 전 뮤지컬 미남이시네요에서 눈여겨 본 후 최근에 몇몇 드라마에서 다시 보게 되어 팔로우를 했다. 박지연 배우의 인스타그램에서 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봤을 때는 과거 두번이나 봤지만 감흥이 없던 이 작품을 다시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자주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 작품을 포함한 몇 개의 뮤지컬을 추천하는 글을 봤고 그 글에 영업 당해 예매하게 된 것6.
- 만남과 이별을 서술하는 작품 제목이 the last 5 years (지난 5년)인데 프로포즈 넘버 제목은 the next 10 minutes (다음 10분)이다. ↩︎
- 노래를 부르지 않는 배우는 무대 한켠에서 약간의 연기를 하며 NPC처럼 앉아있다. 이 NPC배우의 연기는 본인의 시간대에 맞춘 것인지 노래를 하는 상대방의 시간에 맞춘 것인지는 애매한데 아마 본인의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긴하다. ↩︎
- 작년 초에 잔뜩 빠져있떤 뮤지컬 물랑루즈의 남자 주인공이었음. 나는 홍광호 배우 공연만 골라 봤지만 여러 클립에서 이충주 배우를 많이 봤었다. ↩︎
- 둘이 사귀는 거 아냐?란 생각이 들 정도. ↩︎
- 이지영 연출. 입봉 작이라고 한다. ↩︎
- 여담이지만 내가 잘 이해를 못 하던 슈무엘송 The Schmuel Song이란 넘버의 의미도 이글에서 알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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