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인가 레미제라블 월드투어팀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꼭 보고 싶어 제일 앞 줄로 예매를 해놨는데, 입영 영장이 나와 훈련소에 들어가는 바람에 공연을 놓쳤다. 그리곤 한동안 국내에서 레미제라블 소식을 들을 순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올해, 캐머런 매킨토시의 4대 뮤지컬 중 마지막으로 국내 라이센스 버전이 만들어졌다. 용인에서 프리뷰로 몇 번 공연한 후, 용인, 대구, 부산을 돌아 서울로 입성하는 스케쥴. 지방에서 먼저 공연하고 서울로 들어오는 건 언론의 관심을 좀 덜 받는 지방에서 공연을 좀 더 다듬어 완성도를 높인 후에 서울에서 짠! 터뜨리겠다는 의도 같은데, 워낙 작은 나라라 그게 잘 통할 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미스사이공 라이센스 공연도 비슷하게 했던 것 같은데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려웠던 것 같고.
프리뷰 공연의 마지막 공연을 보고 왔다. 좀 일찍 예매했으면 좋은 좌석을 구했을 텐데 뒤늦게 충동적으로 예매하느라 좋은 자리는 아니었고. 1층 구석을 할까 2층 앞 쪽을 할까 고민을 했었는데 포은아트홀에 가서 보니 1층 구석이 나았다. 다른 극장들과 다르게 2층 객석이 상당히 뒤로 물러나 있었다. (아래 그림의 20열 정도?) 좌측면 좌석은 크게 시야가 나쁘진 않았다. 무대가 멀긴 멀었지만.
작품 자체가 정말 훌륭하다.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장발장의 이야기가 송스루(sung-through)로 군더더기 없이 줄줄 이어지는데 딴 생각 할 여지가 없다. 내가 다른 공연들에서 장면과 장면 넘어 갈 때 생기는 부자연스러움이나 쓸데 없는 장면이 시간을 차지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레미제라블은 공연 전체를 통틀어 그런 불만이 없었다.
19년 동안 복역한 장발장이 가석방을 받아 육지를 밟았으나 전과자란 이유로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을 받고 쫓겨다니다 그 유명한 ‘은촛대 사건’이 나오는데 여기가 첫 번째 소름의 포인트. 배은망득하게도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이 죄가 없다고 얘기하는 신부의 노래 (‘Valjean Arrested, Valjean Forgiven’)와 이어지는 격정적인 장발장의 깨달음 (‘What Have I Done?’)까지 흐름이 아주 좋다.
레미제라블 한국 프로덕션 미디어콜: 정성화 장발장의 What have I done
위 영상은 국내 공연 프레스콜의 정성화 씨 버전이고 유튜브에 브로드웨이 공연으로 추정되는, 누군가 몰카로 찍은 Drew Sarich의 버전이 있다. 안타깝지만 Drew Sarich의 노래가 훨씬 낫다 ㅠㅠ. 다만 실제 공연에서는 극 중 절실한 상황에 빠져 정성화의 노래도 용납할 만 했다.
이 영상에서 신기한 건 도둑 녹음한 브로드웨이 버전의 음향이 국내 공연 것보다 훨씬 낫다는 점. 한국 공연에선 배우들의 노래와 대사가 제대로 관객에게 전달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미국 극장들은 어떻게 이리 대사가 또렷히 전달되는지 미스테리.
다시 공연 얘기로 돌아와 이어지는 공장 장면. 앞 장면으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이다. 참고로 레미제라블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걸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미리 줄거리를 읽고 가는 게 좋다. 나도 인터넷에서 찾은 줄거리를 읽고 갔는데 도움이 됐다. 공장에서 팡틴이 쫓겨 나고 또 다른 히트 넘버인 ‘I dreamed a dream’을 부른다. 조정은 팡틴의 노래도 무척 좋아 또 한번 전율.
그 후 신분을 숨긴 장발장과 경찰 자베르가 우연히 재회하는데, 가석방 상태에서 사라진 장발장으로 오인돼 누명을 쓴 사람이 재판을 받는다는 자베르의 말에 장발장은 자신을 밝혀야 하는지 부르며 고민을 하고, 갈등 끝에 법정에 나가 명곡 ‘Who am I’를 부르며 자신이 바로 죄수 번호 2 4 6 0 1이라며 외친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발장 (정성화 장발장)은 삑사리를 낸다.
이 장면 앞까지 완전 극에 빠져 있었는데 저 삑사리 이후론 집중이 안 됐다. 이 죄수 번호 외치는 장면에 기대가 컸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목소리 뒤집어지는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다. 공연 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프리뷰 공연에서 정발장이 종종 그랬다는 글들을 보고 기가 막혔다. 장발장의 정의로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인데 배우가 소화를 못 하다니… 브로드웨이의 Drew Sarich가 부른 “Who am I” 공연 장면을 보면 깨끗하게 마지막 음까지 뽑는다.
마지막 1에 해당 하는 음은 정발장의 음역을 오버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성화씨가 이 역에 캐스팅이 됐는지 의문이다. 영국에 보컬 트레이닝 받으러 갔다왔다는 기사를 본 적 있는데, 그나마 오디션 본 사람들 중 가장 나은 사람을 캐스팅 한 후에 음역대를 좀 더 늘려볼 생각이었던 것일까? 프리뷰 기간 끝난다고 고쳐질 일도 아닌 것 같고, 좋아하는 배우지만 참 아쉽고도 걱정이 된다.
법정에서 자백한 후 도망간 장발장은 죽어가는 팡틴에게 딸은 자기가 맡겠다고 겁 없는(?) 선언을 하고, 공연 끝까지 맡아 키우느라 고생(?)을 하게 된다… 팡틴이 이른 시간에 죽자, 조정은씨를 좋아하는 아내는 ‘뭐야 단역이잖아!’라고 분노를 하기도… 장발장과 그를 쫓아온 자베르가 한 판 붙기도 하는데 좀 싱겁게 끝나고…
배경이 바뀌어 떼나르디에 부부의 여관 장면. 희안하게 음반으로 레미제라블을 배운 나는, 음반에서 이 사기꾼 부부가 부르는 ‘Master of the House’를 가장 좋아했다. 공연에서도 신나긴 했지만 뭉개진 음향 때문에 가사가 잘 안들리는 아쉬움이 있었고, 떼나르디에 부인 역의 박준면씨 목소리는 많이 쉬어 고음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도 아쉬웠다. 오랜만에 보는 떼나르디에 역의 임춘길씨는 노래가 는 느낌. 어쨌든 왁자지껄 한 장면으로, 맹인 손님의 새를 몰래 새장에서 빼어 그대로 갈아 버리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_-;;;
이 장면 앞 뒤로 레미제라블 포스터에서 단독샷을 받는, 팡틴의 딸인 어린 코제트가 나오는데 별 임팩트는 없었다는… 장발장이 코제트를 맡고 배경이 바뀌는데 또 별다른 표시 없이 몇 년이 지난 상황.
사랑의 삼각관계를 이루는 성인 코제트, 떼나르디에의 딸 에포닌, 그리고 마리우스가 등장. 마리우스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무척 미성. 노래를 못 하는 건 아닌데 가는 목소리로 바이브레이션이 불안하게 느껴져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이 마리우스는 코제트에 한 눈에 반하는데, 내가 보기엔 에포닌이 훨씬 예뻤다. 막 자란 아이라고 얼굴에 뭘 덕지덕지 발라놨는데도 얼굴에서 빛이 났음. 에포닌은 뮤지컬 미남이시네요에서 카랑카랑하게 뻗어나가는 목소리로 내 관심을 끈 박지연씨가 맡았는데, 여기서도 노래는 잘 했지만 대극장에선 좀 잘 안 맞는 보이스 칼라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클래식한 뮤지컬과 안 맞는 목소리인가? 대극장용이면서 현대극이었던 맘마미아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On my own’을 영어로 들었을 땐 몰랐는데, 한국어로 들으니 정말 처절한 짝사랑 노래다. 불쌍한 에포닌.
레미제라블 한국 프로덕션 미디어콜: 박지연 에포닌의 On My Own
이번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칭찬을 받는 건 자붸르 역의 문종원씨. 내가 봤을 때 이 분이 그리 극찬을 듣는 것은 육성이 엄청나게 뭉개진 이번 공연에서 가장 또렷하게 노래를 해서가 아닌가 싶다. 자신의 마지막 넘버인 “Soliloquy”를 부를 때는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역에 잘 맞았지만 크게 돋보인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극에 완전히 녹아들어갔기 때문일까.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나 ‘One Day More’ 같은 명곡이 나오는 곳에선 온몸이 찌릿찌릿 했다. 특히 ‘One Day More’는 그 동안 나왔던 여러 곡들이 마치 합체 로봇이 결합하듯 하나의 곡으로 합쳐지는 멋진 곡. 레미제라블의 음악들, 참 좋다. 뮤지컬의 특징인 나왔던 노래 또 나오기(뮤지컬 스팸어랏의 표현)가 아주 잘 돼 있다. 김문정 음악감독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도 명곡들에 잘 맞게 좋았다.
레미제라블 한국 프로덕션 미디어콜: One day more
전혀 관심을 안 갖고 있다 좋아하게 된 넘버는 장발장이 2막에 부르는 ‘Bring Him Home’. 바리케이트를 쌓고 정권에 맞서는 학생들이 잠든 사이 장발장이 부르는 이 곡은 자장가 같기도,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의 ‘미안해’란 넘버 같기도 했는데, 듣고 있으면 힐링이 되고 눈물이 절로 난다. 이 공연에서 정성화씨가 부른 노래 중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공연 마지막, 장발장이 세상을 떠날 때 다시 한 번 반복될 때 역시 무척 좋았다.
회전무대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한국 프로덕션에선 영상으로 대체했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직접 그렸다는 유화 배경은 무대 위의 세트와 이질감이 없이 훌륭했다. 배경 영상이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지하 하수도 도피 씬에서는 동영상을 적절히 활용해 입체감을 살린 반면, 자베르 자살씬에서는 조금 아쉬웠다. 레미제라블의 대표적 세트인 바리케이트를 보고는 웹툰 무한동력의 무한동력 기계가 떠올라 픽 하고 웃었다 -_-;
공개된 프레스콜 영상을 보고 좀 실망했는데, 프리뷰 공연은 그런 우려를 대부분 날려줬다. 명곡들을 완전히 소화 못하는 배우와 노래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환경이 안타까웠지만, 레미제라블이란 뮤지컬이 뮤지컬 역사에서 오랫동안 빛날 훌륭한 작품이란 걸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2012년 11월 15일 저녁 8시
포은아트홀 1층 A구역 10열 6
S석 7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