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마지막 날, 류정한, 옥주현, 조휘, 전동석, 조원희씨 공연을 보고 왔다. 공연을 보며, 보고 온 후에 든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다. (스포일러 주의)
상전벽해, 유니버설 아트센터
유니버설 아트센터는 2007년 초의 뮤지컬 ‘하루’ 때 가보고 처음 가봤다. 장점이라곤 주차가 무료라는 것 밖에 없던, 팬들에게 기피 대상 극장 1위 자리를 내어주지 않던 이 극장의 내부가 훨씬 나아졌다. 높낮이 구분 없이 평평한 바닥에 의자를 깔아놨던 1층엔 제대로 된 극장 좌석이 계단 형식으로 설치됐다. 단 차이가 꽤 돼 1층 제일 뒷 좌석의 높이는 2층에 달한다. 내 좌석이 1층 제일 뒷 열 구석임에도 불구하고 시야도 괜찮았고 음향도 괜찮았다.
감정이입되는 온 세상 내것이었을 때
인터넷에 공개된 듀엣곡 ‘언제나 그대 곁에’와 여주인공 메르세데스의 솔로곡 ‘온 세상 내것이었을 때’를 들었을 때 첫 곡이 훨씬 좋았다. 멜로디가 더 마음에 들었고 듀엣곡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들으니 ‘언제나 그대 곁에’는 좀 밋밋하다. 그보다는 옥주현의 솔로곡인 ‘온 세상 내것이었을 때’가 훨씬 더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 이유는 이 곡이 굉장히 묘사적이었기 때문이다.
눈부신 햇살 기억나 더 없이 부드러운 밤
기억나 아름다웠던 그 하늘의 붉은 노을
달빛 넘어 별빛 따라 날 찾아온
당신의 달콤한 입술 느낄 땐 하늘을 날듯이
온세상 내 것 같았지 아무 걱정 없던 날
밤새 나눈 이야기들 우리 앞엔 희망만이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을 회상하며 현재의 암담함을 노래하는 이 곡의 가사를 듣고 있으면 몇십분 전에 봤던 (‘사랑이 승리할 때’란 넘버를 부르는 씬의) 무대 배경이었던 노을 – 배 위에서의 키스 – 선두에서 팔을 펴 안고 있던 장면이 눈앞에서 리플레이 되는 희안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 추억을 얘기할 때 은은한 음악과 함께 과거 영상이 슬로우모션으로 재생되 듯. 이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던 씬이었다. 단지 옥주현씨 혼자서 노래 한 곡만 불렀을 뿐인데.
이게 옥주현 배우의 역량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난 연출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공연 전체적으로 시간 선상의 점들을 연결하는 연출이 잘됐단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어 메르세데스가 받은 반지는 극 중간 중간 계속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눈에 띄게 메르세데스의 손에 얹혀 있다. 위에 설명한 ‘온 세상 내것이었을 때’를 부를 때도, 2막 무도회에서 몬테크리스토가 손등에 키스하며 인사를 할 때도. 또 ‘여자들이란’을 부를 때 두 남자의 여인들이 환영처럼 나타나는 것도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투영하는 재미있는 연출이었고.
절창 류정한
언젠가 썼듯이 난 류정한의 멜로 연기를 별로 안좋아한다. 몇년 전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서 사랑을 노래하던 류정한씨의 로맨틱하지 않던 표정이 아직도 머리 속에 콕 박혀 있기 때문. 스위니토드의 류정한씨가 좋았던 이유는 여기선 그가 멜로 연기를 할 일이 없었기 때문. 다행히 몬테크리스토에서 남자 주인공의 로맨스는 앞 부분에만 잠시 나오는데다가 내 자리가 뒷자리라 류정한씨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_-;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연기가 어땠는진 모른다)
표정 연기를 떠나 노래에 관해 적어 보자면 원래도 잘하지만 이날은 정말 잘하더라. ‘절창’이란 느낌이 팍팍 들었다. 공연 내내 모든 곡을 잘 했지만 지킬과 하이드의 ‘Alive’가 떠오르는 롹 넘버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을 폭발적으로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른 누가 저렇게 부를 수 있을까’란 생각까지 들었다. 진짜 완전 다 박살낼 기세. 류정한 짱이다.
아쉬운 스토리
어렸을 때 읽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나에게 통쾌한 복수극으로 남아 있기에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도 복수극이 될 줄 알았지만 복수는 노래 하나 부르며 끝내 버린다. 투자 사기를 쳤다는 큰 그림 외의 디테일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단 명료하게 복수를 다뤘기에 복수의 통쾌함을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이 작품의 화두가 사랑과 용서이기는 하지만 나쁜 놈들은 좀 더 자근 자근 밟아줘야 하는거 아닌가?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꼼꼼하게 진행된 앞부분과 복수 이후의 이야기가 비교가 되기에 더욱 아쉽다. 루저 삼인방 (몬데고 조휘씨, 빌포트 판사 조순창씨, 당글라스 장대웅씨)중 몬데고만 살아남아 스토리를 질질 끄는 것도 마음에 안들고, 알버트의 출생의 비밀 부분도 어색하다 (사랑과전쟁?) 몬테크리스토와의 총싸움에서는 허술하게 진 알버트가 마지막 장면에서 딴 사람 총을 번개 같이 꺼내 몬테크리스토의 뒤에 있는 몬데고를 한 번에 명중시키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되짚어 보면 몬데고는 알버트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걸 알고도 키워준 건데 알버트는 안지 얼마 안되는 친부를 위해 단방에 키워준 아버지를 쏴없애 버린다. 기른 정은 다 어디로 가고.. 흑
몬테크리스토가 보물을 발견한 이후에 갑자기 복수의 화신이 되는 것도 어색하다. 지킬에서 하이드로 변신하는 것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나? 감옥에 있을 때부터 복수에 이를 갈며 탈출 준비를 했어야 사람들이 더 수긍할텐데.
감옥에서 탈출한 주인공을 건져주는 밀수꾼 배 위에서의 씬도 마음에 안든다 (밀수꾼인지 해적인진 모르겠는데 원작에선 밀수꾼). 너무 이질적이라 확 빼버리고 싶었다. 체코 뮤지컬 드라큐라에서 클래식한 1막을 본 후에 펑크한 2막 오프닝을 봤을 때의 충격이랄까? 절친(이라기보단 심복이라고 해야 하나?)을 만나는 장면을 넣기 위해서일까? 2막 오프닝인 가면 축제의 같은 패들을 소개하기 위해? 그건 돈 많은 몬테크리스토가 돈 주고 샀다고 하면 되는 건데.
좋은 음악과 몇몇 유치한 가사
좀 깨는 곡이 있긴 했지만 음악은 전반적으로 좋다. 첫곡인 ‘사랑이 승리할 때’는 좀 긴장감이 풀려있던 나를 공연에 확 빠져들게 한 훌륭한 듀엣 곡이었고, 감옥씬이 시작되면서 나오는 ‘하루 하루 죽어가’도 남성 앙상블의 목소리가 좋았고 장면에 잘 맞았던 곡. 앞서 말한 ‘온 세상 내것이었을 때’란 아리아도 같은 작곡가의 ‘Once upon a dream”을 떠올릴만큼 훌륭했다.
가사의 경우 어떤 부분이 그랬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너무 직설적이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번안할 때 박자를 맞추기 위해 격조사를 빼고 문장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너무 잦으면 유치하게 들린다. 음악은 우아했는데 가사도 좀 그래줬으면.
류정한씨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전동석
공연 볼 때마다 원래 모르던 배우에게 관심이 꽂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공연의 경우엔 전동석씨가 대상이었다. 1막 마지막 쯤 등장해서 대사만 치다가 2막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전동석씨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감미로워 놀랐다. 특히 류정한씨와 듀엣으로 부르는 ‘여자들이란’ 노래에 감동했다. 이 남자 듀엣곡이 남녀 주인공 커플의 듀엣곡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거란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ㅎㅎ
영상 사용의 좋은 예와 나쁜 예
최근 뮤지컬 퀴즈쇼, 영웅, 로맨스로맨스에서 봤듯이, 공연 중 배경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빔프로젝터를 쓰는 건 일반적이 된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선 효과가 백만배였다. 특히 파도의 표현과 탈출 씬의 수중 표현은 빔프로젝트를 쓰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시간이 흐르는 장면이나 배를 보여주는 등의 몇몇 장면에선 빔프로젝트란 신기술을 너무 남용해 공연이 저렴해 보이는 나쁜 예도 있었다.
어쨌든 재미있게 본 공연이다. 옥주현씨도 좋았지만 류정한씨의 노래가 돋보였던 공연!
2010년 4월30일 오후 8시
유니버설아트센터 S석 1층 C구역 20열 5번
송파구민 50%할인
볼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오빠 덕분에 봐야겠다는 결심이 굳었어요.^^ 사실 엄기준이냐 류정한이냐도 고민하고 있었는데…이것 역시 류정한으로 확정!
전-_-뮤지컬에서 노래 못 부르는 게 제일(?) 거슬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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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준씨도 노래를 잘하고, 비주얼도 괜찮지만
역시 이 작품은 류정한이 진리인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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