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라노 – 뻔하지만 슬픈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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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저녁 공연. 스토리 자체는 평이했지만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한 서정적 넘버들과 타이틀 롤을 연기한 최재림의 노래가 훌륭했다. 합창씬에서 대사가 잘 안들리는 것 빼곤 만족스러웠던 공연. 앞쪽의 코믹한 내용과 중세 유럽의 배경 때문에 같은 작곡가의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보단 전체적으로 나았다.

내용

17세기 프랑스 파리, 글도 잘 쓰고 칼도 잘 쓰는 문무겸장에 유머 감각까지 충만한 시라노(최재림 역)에게 부족한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외모. 코가 괴상하리만큼 컸던 것이다. 그럼에도 시라노는 어디서든 당당했지만 어릴 때부터의 여사친인 록산(이지수 역)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 못하고 있다. 어느 날 록산은 우연히 알게 된 크리스티앙(차윤해 역)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시라노는 말재주가 없는 크리스티앙 대신 록산에게 연애 편지를 써주며 다른 이의 이름으로나마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전하게 된다.

그러다가 록산과 결혼한 크리스티앙은 신참 용병이 되어 스페인과의 전쟁 최일선에 나가게 되는데 록산은 용병 대장 시라노에게 자기 남편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아니, 짝사랑하는 록산이 딴 남자랑 결혼한 것도 괴로운데 남편을 챙기기까지 해달라고? 록산의 어장 관리가 도를 넘는거 아냐? 남녀 둘다 시라노를 너무 이용해먹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한 순간, 시라노는 ‘홀로’란 넘버를 부른다.

왜 신은 내게만 언제나 지독하고 가혹한 웃음을 짓는가
내가 뭘 바랬나, 그저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도우려 했잖아
아프고 아프고 아프고 아파도

아무도 없는 이 길 가야 한다면 가야겠지
암흑 뿐인 길이라도 당당히 걸어가리

승리도 패배도 다 내 몫이니 늘 그랬듯
기꺼이 맞서리라 홀로

세상이 날 짓밟아도 달을 쫓아 나는 가리
콧대를 높이 치켜들고

내가 선택하고 있는 진실하고 강한 빛을
굳게 지켜내야 하니까

거친 광야 속에서 이슬 맞으며 잠을 자고
날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길이겠지

날 할퀴는 사람도 전쟁과 운명도 난 두렵지 않아
이대로 난 앞으로 나아가리 나아가리

홀로

이 장업한 곡을 들으니 내가 시라노의 대인배스러운 마음을 너무 모르고 있었단 걸 알게 됐다. 시라노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고 가슴이 아파도 담담히 그 길을 걸어 가겠다는 것이다. 울컥. 여태까지 들은 최재림의 노래 중 이 곡이 가장 훌륭했다. 노래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든 연출도 좋았다. 사실 이 곡을 부르기 전까지만 해도 최재림의 노래에 예전처럼 감동하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곡이 그 생각을 리셋했다. 1막 엔드.

(아래 2막 스포일러 주의)

2막은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씬들로 시작. 전쟁에서 크리스티앙이 죽는데, 죽을 때 록산에게 편지의 비밀을 밝히지 않아 이 비밀이 영원히 묻히게 됐다고 생각했다. 이후 시라노가 “사실은…”하고 밝힐 수가 없지 않은가. 이후 이런저런 일이 생기고 15년 후, 록산은 시라노를 다시 만난다.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 얘기를 하면서 눈치 없던 록산은 뒤늦게 그 편지를 시라노가 썼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열하고, 칼에 찔린 상처를 숨기고 있던 시라노는 ‘홀로 리프리즈’를 부르며 사망한다. 짝사랑의 애절함에 눈물이 흘렀고, 주변에서도 훌쩍 훌쩍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죽을 때까지 유머러스하고 진실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록산이 ‘최고의 남자’란 노래에서 “가시밭 속을 걸으며 거인들을 무찌르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도 그의 길을 갈 뿐이야”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런 그의 모습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떠오르기도. 전쟁 장면이나 귀족과 대립하는 장면이 중간 중간 나오지만 이 작품의 본질은 이루어지지 못한 로맨스였다. 그래서 1막 마지막과 2막 마지막이 가장 좋았다.

크리에이티브 팀

이 뮤지컬의 원작은 프랑스의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 Edmond Rostand이 1897년에 쓴 희곡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이다. 이 희곡을 바탕으로 여러 번 뮤지컬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위키피디아에서만 찾은 프로덕션들.

공연 연도작곡작사
1973년 (브로드웨이)Michael J. LewisAnthony Burgess
1993년 (브로드웨이)Ad van DijkKoen van Dijk
2009년 (도쿄)프랭크 와일드혼레슬리 브리커스

내가 본 한국 프로덕션은 프랭크 와일드혼과 레슬리 브리커스가 작곡/작사한 버전. 2009년 토쿄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이후 토쿄와 서울에서만 공연됐다. 이 작곡/작사가 페어는 한국에서 대히트한 뮤지컬 지킬과하이드의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한 다른 곡들처럼 배우의 역량을 뽐낼 수 있는 곡들이 있어 한국인의 취향에 잘 맞을 것 같다. 몇 곡은 그가 작곡한 뮤지컬 <몬테크리스토>가 떠오르기도.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이라 레슬리 브리커스가 쓴 원어 가사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김수빈 씨가 쓴 한국어 가사는 꽤 괜찮게 번역됐다.

배우

  • 최재림 (시라노): 최재림 배우 하나만 보고 예매한 회차였는데 성공. 시라노의 넘버들과 목소리가 잘 어울렸고, ‘거인을 데려와’나 ‘홀로’같은 대표곡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 이지수 (록산): 수년 전에 데뷔작이었던 레미제라블 초연을 본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벌써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배우가 됐다. 당시든 지금이든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맑게 노래한다. 다만 시라노, 크리스티앙, 드기슈 모두의 사랑을 받는 마성의 여인 느낌은 없었다. 2막 뒷부분의 나이든 모습이 더 잘 어울렸다.
  • 차윤해 (크리스티앙): 처음 보는 배우. 여자 앞에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리버리한 역할이라 노래도 못할 줄 알았는데 웬걸, 외모 뿐 아니라 노래도 훌륭하시다. 소리를 약하게 낼 때 가사 전달이 잘 안되는 부분만 나아졌으면.
  • 이율 (드기슈): 뮤지컬 퀴즈쇼 때 보고 얼마 만인지. 창작 뮤지컬 퀴즈쇼의 오리지널 민수였는데 재연을 안하네. 하여튼, 이 작품에서는 등장은 꽤 하지만 비중은 적은…

연출, 무대

회전 무대를 사용하지만 2막에서 한정적으로 사용된다. 회전 무대 연출이 좋았단 하데스타운이 떠오르며 좀 아쉬웠다. 그 외에 몇 안되는 무대 장치들은 딱 적당했다. 화면을 조금 많이 썼지만 부담스러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커튼콜에서 화면의 달 안에 음악 감독이 뜨는 건 무척 재미있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는 도대체 어디에 앉아 있는거지?

주인공 시라노가 검술에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칼싸움 장면이 여러번 나오는데 며칠 전에 본 알라딘의 애들 장난 같은 칼싸움과 비교 된다. 챙챙 소리도 좋고 속도감도 있다. 가스콘 용병대의 군무가 몇 번 나오는데 좀 더 합이 잘 맞았으면 좋았을 뻔. 나는 이 작품의 로맨스 라인에 집중하느라 가스콘 용병대 씬은 별 감흥 없이 지나가긴 했다. 전투 장면에서 스페인군의 총알을 빛으로 표현한 건 근사했다.

좌석 시야

1층 우측블록 4열 3번 좌석인데 시야가 좋았다. 무대 깊게 쓰면 잘 안 보일까 불안했지만 문제 없었다. 우측 좌석이라 무대 하수 쪽은 조금 멀게 느껴진다.


2025-01-23 (목) 19:30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1층 C블록 4열 3번
R석 3차조기예매 10%할인 13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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