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데스타운 후기 – 박력 있는 뮤지컬

작성 |

몇 년 전 LG아트센터에서 뮤지컬 하데스타운 Hadestown의 국내 초연을 했을 때 그리스 신화가 배경이란 말을 듣고 보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들은 Road to Hell이란 넘버가 완전 취향 저격이었지만 나에게 익숙치 않았던 그리스 신화가 이 작품의 진입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최근 뮤지컬이 땡겨 공연 중인 작품들을 살펴봤는데 그나마 하데스타운이 나은 것 같아 예매했고 대성공이었다! 무척 마음에 든 공연!

작품 배경인 그리스 신화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포네-하데스 커플과 오르페우스-에우뤼디케 커플 이야기를 따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이 내용은 잘 몰라도 그만이다. 즉, 몇년 전에 내가 괜히 겁먹고 안 봤던 것이다. 그래도 간략히 적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첫번째 커플인 페르세포네와 하데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가 들판에서 꽃을 따던 페르세포네를 보고 지하 세계로 납치하여 아내로 만들었다. 페르세포네는 한 해의 반은 남편인 하데스가 있는 지하에서, 나머지는 지상에서 지냈는데, 지하에서 보내는 반년은 가을과 겨울이, 지상에서 보내는 반년은 봄과 여름이 됐다고 한다.

두번째 커플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커플의 얘기는 뮤즈의 아들인 오르페우스가 에우뤼디케와 결혼했는데, 어느 날 에우뤼디케가 방울뱀에 물려 죽었다. 오르페우스는 아우리디케를 살리기 위해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옥으로 찾아간다. 그 이후 얘기도 있는데 뮤지컬 내용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생략. 나도 이 정도만 알고 보러 갔음. 이름이 어려우니 이름 정도만 익숙해져 가면 될 듯.

그리고 여행의 안내자이며 전령의 역할을 하는 에르메스라는 신이 있다. 극 내에서는 오르페우스를 지하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극 외적으로는 신들의 이야기인 이 공연을 관객인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공연 후기

하데스타운에 끌린게 우연히 듣게 된 첫곡인 Road to Hell 때문이었는데 음악이 역시나 엄청 좋다. 뮤지컬 공연에서 쉽게 듣기 힘든 리드미컬한 트럼본 사운드가 완전 내 취향이다. 밴드는 오케스트라핏이 아닌 무대 위에서 연주한다. 무대는 좁게 쓰고 무대 장치의 변화는 거의 없어서 밴드가 한켠에 자리 잡은 작은 술집에서 악단은 연주하고 배우들은 공연하는 느낌. 세트의 변화는 없지만 회전 무대를 잘 써서 여러 상황을 잘 표현한다.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회전 무대 중앙에 리프트를 설치하여 지하 세계로 이동하는 관문을 표현했다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리프트 없이 중앙 뒷편에 클램쉘 Clamshell 도어를 만들어 지하로 이동하는 관문을 표현했다1 . 이 곡에서 나레이터인 에르메스(최재림)가 일반적인 공연과 다르게 무대 위에 있는 모든 배우 하나하나를 관객에게 소개한다. 에르메스가 신나게 이 넘버를 불러재끼면 환호성이 절로 나온다.

하데스(양준모)가 지상에 와있는 페르세포네(김선영)를 데려가는 넘버인 Way Down Hades Town 역시 트럼본이 쿵짝쿵짝 하는 신나는 곡이다. 아아, 정말 서서 춤추면서 보고 싶은 공연이다. 에르미스와 페르세포네에 이어 세 명의 운명의 여신(이지숙, 이다경, 박가람)이 노래하는데, 이들이 만드는 아름다운 화음은 어느 솔로보다 아름답다. 공연 내내 이들이 음악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페르세포네가 하데스를 따라 지하에 내려온 다음에 나오는 넘버인 Chant는 하데스, 페르세포네, 에우리디케(김수하), 오르페우스(조형균)가 각자의 상황과 의견을 노래하는 곡인데 특히 앙상블(이지원, 남궁혜인, 양병철, 최원섭, 권상석)의 안무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대단하다. 박력과 울림이 있다. 묘하게 섹시한(?) 광부같은 의상이 안무와 찰떡이다. 이 곡 뿐 아니라 여러 장면에서 배우들이 “우”, “취”, “슉” 같은 구령을 넣는데 곡에 리듬감과 에너지를 가한다. 그저 곡이 좋은게 아니라 연주, 가창, 안무, 의상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진 작품이 하데스타운인 것이다. 이런 느낌을 받은 뮤지컬은 처음인 듯. 이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씬 하나를 뽑으라면 바로 이 Chant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선 에우리디케가 방울뱀에 물려 죽지만 이 공연에서는 뱀(?) 같은 빌럼 하데스와 운명의 여신들에게 낚여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공연에선 이 때 에르메스는 방울뱀 소리를 낸다.) 운명의 여신들이 에우리디케이게 하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부르는 노래가 When the chips are down. 템포가 빠른 곡인데 운명의 여신의 중창도 끝내주고 피아노와 기타 연주도 끝내준다.

그리고 1막의 끝 곡은 Why We Build the Wall. 하데스가 지하로 내려온 에우리디케를 포함한 하데스타운의 주민에게 그들이 쌓는 높은 벽이 자유를 위한 것이라는 연설을 한다. 이 내용이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는 트럼프의 주장과 비슷하여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물론 이 곡은 트럼프가 이 주장을 하기 훨씬 전에 씌여진 곡이라고 한다.

1막을 보는 내내 렌트와 브루클린이 많이 생각났다. 기타를 들고 궁극의 음악을 계속 찾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에선 로저가, 촛불을 켜며 추위를 피하려는 에우리디케에게는 미미의 향기가 났다. 다 같이 술 마시고 노래하는 Livin’ It Up On Top은 렌트의 La Vie Bohème씬이 생각났다. 한편 오르페우스의 “라라라라라~”하는 한 조각의 멜로디는 뮤지컬 브루클린에서 동명의 여주인공이 기억하는 짧은 소절의 자장가2가 떠올랐는데, 뮤지컬 브루클린 역시 이 멜로디의 완곡을 찾는 과정을 노래한 작품이어서 하데스타운과 비슷한 점이 느껴졌다.

나는 1막을 재미있게 보더라도 인터미션 뒤 2막에서 텐션이나 재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하데스타운은 그렇지 않았다. 페르세포네가 부르는 2막 첫곡인 Our Lady of the Underground은 째지한 전주로 시작해 잠시 멈춰있던 몸이 다시 리듬을 타게 만든다. 페르세포네가 밴드 멤버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다시 텐션 업.

후반부의 Epic 3넘버에서 오르페우스가 공연 내내 찾던 곡을 완전히 들을 수 있다. 팔세토Falsetto로 부르는 이 감미로운 사랑 노래는 극중 하데스와 프르세포네 뿐 아니라 내 눈도 촉촉히 젖게 만든 곡. 특히 하데스가 조심스럽게 “라라라”하는 장면에선 울컥 안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Doubt Comes In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잘 모른 채 본 내가 긴장하며 본 장면. 뒤를 돌아보면 안 되는 오르페우스가 먼저 지상으로 떠나고 에우리디케가 뒤따라가는 장면이다. 의심이 커져가는 오르페우스, 의심을 속삭이는 세명의 운명의 여신, 확신을 주려는 에우리디케의 노래가 조명과 회전무대가 조합된 환상적인 무대 연출로 어우러진다. 이 뒤의 내용은 스포가 될 수 있으니 패스.

음악 스타일이 너무 내 취향인데다가 노래, 연주, 각본, 연출이 훌륭하여 아주 마음에 든 공연이었다. 앙상블까지 포함하여 겨우 13명의 배우만 등장하지만 샤롯데극장의 무대는 배우들의 에너지로 꽉 찬다. 처음 보는 배우들이 많았는데 주연 뿐 아니라 조연과 앙상블까지, 배우 한명 한명이 반짝 반짝 빛난다. 성스루 뮤지컬로 끝까지 지루함 없이 노래가 이어지는 것도 매력. 요즘 국내에서 보는 공연마다 퀄리티가 높아서 감탄하며 만족하는데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더 훌륭하고 더 특별했다.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은 2019년 토니상에서 최우수 뮤지컬 상을 받았고, 국내 프로덕션은 2021년 초연으로 2022년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럴만하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작사, 작곡, 그리고 각본까지 한 사람이 썼다! 아나이스 미첼 Anaïs Mitchell이란 포크 가수가 그 주인공. (또) 놀랍게도 아나이스 미첼은 20대 중반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 전에는 뮤지컬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내가 감탄한 이 공연의 오리지널 연출3은 레이첼 차브킨 Rachel Chavkin. 얼마 전에 국내에서도 공연한 그레이트 코멧 Natasha, Pierre & The Great Comet of 1812 도 이 분이 연출한 작품. 하데스타운을 보니 그레이트 코멧도 내 취향이었을 것 같은데 놓친게 안타깝네.

동행한 와이프는 배우들이 노래를 못했다는 예상 외의 평을 했다. 난 최재림, 김수하 배우의 보컬이 완전 내 취향이었다. 김수하 배우는 무대에서 처음 보는 배우인데 전반의 Wedding Song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이거다 싶었다. 곧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오르페우스는 극고음의 가성을, 하데스는 극저음의 곡을 불러 상반되는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높은 키의 오르페우스 넘버를 조형균 배우가 불러내는 걸 보고 감탄했다. 반면 하데스의 곡은 키가 엄청 낮은데 노래 잘 하는 양준모 배우가 부르기에도 낮았다. 악보를 보진 않았지만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하데스인 패트릭 페이지Patrick Page의 녹음을 들어봐도 정확한 음을 못 내는 것 같은 것 같기도.

이 좋은 공연에서 유일한 스트레스는 내 바로 앞에 앉았던 덩치 크고 머리 큰 관객분 ㅠㅠ. 늦게 예매한 것 치곤 그럭저럭 괜찮은 자리를 잡았는데 어떻게 해도 이 분의 머리를 피해 무대 중앙을 볼 수가 없었다. 너무 너무 스트레스였다.

2024년 09월 05일 (목) 19:30
샤롯데씨어터 1층 B구역 13열 28번
VIP석 17만원

2024년 09월 05일 캐스트

  1. 이 때문에 브로드웨이 공연에선 이 자리에 있던 드럼이 한국 공연에선 안 보이는 무대 뒷편으로 옮겨진 듯. ↩︎
  2. 멜로디는 다르지만 이 쪽 역시 “라라랄라~”이다. ↩︎
  3. 한국공연의 협력연출은 박소영. ↩︎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