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와 아틀란타 Fox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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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의 찬스

뮤지컬 시카고가 US투어 프로덕션의 아틀란타 공연이 내 출장 중 딱 하루와 겹쳤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 공연을 보러 팍스 씨어터 Fox Theatre로 갔다. 보통 외국에 출장 가서 공연을 볼 때 미리 예매를 하지 않고 현장에 가서 남은 좌석 중 가장 싸면서도 좋은 자리를 사는데 이번 공연은 남은 자리가 거의 없단다. 아마도 상시 공연이 아니라 현지인들도 가끔 한번씩만 볼 수 있는 투어 공연이라 그런 듯? 1층 중앙 앞 쪽과 뒷 쪽 중 고민하다가 가격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서 뒷 쪽 좌석을 선택했다. 64불. 그런데 극장이 생각보다 너무 커서 내가 선택한 좌석은 무대에서 너무 멀었다. 이 극장이 두 층짜리 4600석이 넘는 초대형 극장이런 걸 몰랐네. 가끔 있는 기회인데 돈 좀 더 주고 앞 쪽 좌석을 선택할 걸이란 후회를…

Fox Theatre

공연 장소인 팍스 씨어터는 1929년에 오픈한 유서깊은 극장이다. 내부는 놀랍게도 무굴 궁전같은 인테리어인데 진짜 궁전같은 느낌은 없고 롯데월드 같은 테마파크 분위기이다. 뮤지컬 극장에서는 처음 보는 분위기의 인테리어이다. 여담으로 걸그룹 ITZY가 11월에 아틀란타에서 공연을 하는데 이 극장에서 한다고 한다. 이 극장은 학회가 열린 다운타운보다 지하철 두 정거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동네가 다운타운보단 안전하고 분위기도 나아 보였다. 귀국하는 날 탑승한 리프트 기사에 따르면 아틀란타는 북쪽으로 갈 수록 좋다고.

극장 내부의 매점에서 술을 포함한 음료를 판다. 밖의 술집에 비해 대략 2배 가량 비싸다. 극장 입장 전에 밖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입장하려고 했는데 금요일 저녁이어서인지 공연 때문인지 극장 주변 술집에 자리가 없어서 못 마셨다. 참, 여기에서는 팝콘도 팔더라. 하여튼 한국의 뮤지컬 극장과는 분위기가 좀 다른 편이다.

Fox Theatre
현장 구매한 티켓. 좌석 선택부터 전화번호까지 알려줘야해서 결제에 시간이 꽤 걸렸다.
궁전 인테리어 된 화장실의 위엄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중인 미국 뮤지컬

뮤지컬 중 미국에서 보는 게 훨씬 좋을 법한 공연들이 있다. 렌트처럼 미국적인 공연들. 시카고도 이런 류의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좌석이 너무 뒷쪽이라 배우들 얼굴 구분도 잘 가지 않았던 것 제외하고는 아쉬움이 없는 좋은 공연이었다. 시카고만의 재지한 음악과 밥 포시 스타일의 춤선은 멀리서 즐기기에도 충분했다. 내가 워낙 좋아하는 공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말이 많았던 We both reached for the gun 장면은 미국 배우도 복화술을 하진 않더라. 엄청 뒤에서 보는데도 입이 움직이는 게 다 보일 정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Roxie. 곡 앞 부분의 독백을 끝내고 시작하는 노래 첫 소절 “the name on everybody’s lips is gonna be” (모두가 입에 담는 그 이름) 다음이 “Roxie”인데 나를 포함한 극장 사람들 대부분이 그 순간에 “롹시”라고 속삭이는데 온몸에 소름이… 가사와 딱 맞는 상황. 이처럼 한국에 비해 미국 극장 관객들이 훨씬 더 공연에 반응하는 편이다. 한국에선 관크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환호도 많고 박수도 많고.

극장에서 나눠주는 공연 잡지를 보니 뮤지컬 시카고는 브로드웨이에서 두번째로 장기 공연을 하는 작품이라고. 미국인이 쓴 뮤지컬 중엔 첫번째이고. 팜플렛에 Robert Viagas가 쓴 내용을 보면 작품의 운명이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다.

사법 시스템, 경찰, 언론이 모두 개판이었던 시카고의 기자였던 모린 달라스 왓킨스 Maurine Dallas Watkin 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연극이 1926년 브로드웨이에 올라간다. 1927년엔 무성 영화로 만들어졌고, 1942년엔 ‘Roxie Hart’란 제목의 유성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75년, 여배우이자 안무가였던 Gwen Verdon과 그녀의 남편인 안무가 Bob Fosse가 1926년 버전의 연극을 뮤지컬로 재창조해서 무대에 올렸는데 같은 시기에 나온 밝은 에너지의 코러스 라인과 비교되어 실패하고 만다. 토니상 11개 부분에 노미네이션 됐으나 모두 코러스라인에 뺐긴다. 시카고는 겨우 936회를 공연하고 내려갔고 코러스라인은 브로드웨이에서 6,137회 공연을 하며 그 당시 기준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장기 공연을 한 쇼가 됐다.

터닝 포인트는 1996년 뉴욕시티센터 New York’s City Center 의 앙코르 Encores! 시리즈. 앙코르 시리즈는 과거에 공연됐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 공연을 간소한 세트로 단기간 공연하는 프로그램이다. 오케스트라도 그냥 무대 위 배우들 뒤에서 연주하는 식. 1996년, 앙코르 시리즈에서 재연된 시카고(영상)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밥 포시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Ann Reinking의 “밥포시” 스타일의 안무가 더해졌고, 토니 수상자인 William Ivey Long의 섹시한 의상이 더해졌다. 그랬더니 이게 웬걸, 이 단촐한 공연이 브로드웨이에 제대로 올린 몇몇 공연들보다 더 괜찮은 것이다. 그래서 몇몇 제작자들이 작은 수정을 거치되 간소한 무대는 그대로 둔 채, 이 공연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린다.

이 리바이벌 공연은 오리지널 공연이 못 받았던 토니상을 6개 부분에서 수상한다. 그리고 롱런. 워낙 예산을 적게 써서 만든 프로덕션이라 불황에도 잘 버틸 수 있었다고. 2002년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버전의 시카고가 이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높여 공연의 롱런에 도움을 줬다고한다. 2011년에는 코러스라인이 갖고 있던 가장 길게 공연한 미국 뮤지컬 자리를 뺐었고, 2014년 11월에는 캣츠를 제치고 브로드웨이에서 두번째로 길게 공연한 쇼가 됐다. 2022년에 10,000번째 공연을 했다. 지금까지 시카고보다 길게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작품은 영국 뮤지컬인 오페라의 유령 뿐.

이 공연의 사진은 Playbill 웹사이트 올라온 이 기사에서 볼 수 있다. 시카고 ’25주년 투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듯. 배우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배우들이 나오는 Non-equity 투어 공연1이라고 한다.

이날의 출연진
공연 후. 내 자리에서 본 무대.
무지하게 넓은 팍스씨어터 1층. 빨간 표시된 곳이 내 좌석.

2022년 10월 21일 저녁 8:00
Fox Theatre (Atlanta, GA), JJ 109
현장구매 USD 64


  1. Non-equity 공연의 경우 배우 노동조합(equity)에 가입하지 않은 배우들이 나오는 공연으로 배우들의 고용 조건이 equity 공연에 비해 유연하며, 임금이나 복지 혜택이 적을 수 있다고 한다. 배우 조합에 가입하기 어려운 신인 배우나 경력이 적은 배우들에게는 다양한 무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를 받는 배우들이라 공연의 질적 저하가 있을 수도 있다고. ↩︎

One response to “뮤지컬 시카고와 아틀란타 Fox Theatre”

  1. zoahaza.art: 조아하자 Avatar

    현지에서 뮤지컬을 봤다니 정말 좋으셨겠습니다. 부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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