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는, 전북 서북부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서쪽은 서해, 위로는 금강, 아래로는 만경강이 흐르고 있어 열차가 없던 시절에는 물류 중심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의 세곡을 한양으로 옮기는 배가 다니던 곳이라고 한다.
군산 앞 바다에 ‘군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의 이름을 따서 이 부근 육지의 이름이 군산이 됐다고 한다. 한 편, 이름의 원주인인 ‘군산도’는 이름을 뺐겨 옛군산이란 의미의 고(古)군산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선유도’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이름을 빼았기다니… 슬프다. 하지만 더 슬픈 일은 따로 있다.
1899년 개항 후, 일본의 조계지(개항된 항구의 배후지에 항구를 입출입하는 외국인의 자유로운 상업 및 주거활동을 허용하는 치외법권의 외국인 구역)가 생겼고 곡창지대가 배후에 있는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일제 수탈의 관문이 됐다. 이게 진짜 슬픈 일.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군산엔 아직 근대 일본식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국내 다른 지역과 달리 군산에 특별히 일제 시대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뭘까?
“군산의 원도심이 이렇듯 오랜 시간 동안 그 형태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이후 군산의 도시계획에서 이 지역은 재개발의 대상이 아닌 화재로부터 보호해야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호하려는 시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조성된 시가지를 부수고 새롭게 재개발하는 것보다 그동안 조계지에 밀려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고지대의 조선인 주거지역을 정비하는 것이 시급했던 데에 기인한다.”
– 군산 원도심,‘식민의 기억’을 품은 도시 (서준석)
내가 군산을 목적지로 택한 것도 근대 건축물에 관심이 있어서이다. 현재 군산은 ‘1930년대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란 주제로 남아 있는 일제 시대의 건축물들을 복원, 활용하며 뼈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컨셉으로 관광객을 끌고 있다. 이국적이긴 하지만 새로 지은 건물도 일본식 주택처럼 꾸민건 과한 게 아닌가 싶은 느낌도 들었다. 이런 비판을 염두에 둔 건지 곳곳에 태극기를 걸어두었다.
주요 관광지들은 원도심에 몰려있어 도보로도 충분히 걸어서 구경할만하다. 아무 생각 없이 잡은 첫 숙소가 원도심 근처라서 편하게 걸어서 구경을 다녔다. 월요일에는 대부분의 관광지와 박물관이 문을 닫는 건 염두에 둬야한다. 나도 월요일엔 동국사를 제외한 관광지에 전혀 입장하지 못 했다.
2박 3일동안 보고 다닌 곳들 중 일제 시대 테마에 맞는 곳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1922년 신축한 조선은행 (지금의 한국은행 역할) 군산 지점 건물로 일제 시대에에 찍은 군산항 사진에서도 눈에 확 띌 정도로 크다.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 했는데 이 건물이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장식이 거의 없는 분리파 스타일(세제션)이라 그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던 안톤 펠러의 영향이 컸을 거로 추정한다고. 현재는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군산의 여러 근대 건축물 모형이 있어 흥미롭게 관람하였다. 이 건물의 리모델링에 대한 설명도 있다.리모델링 전에는 노래방과 성인나이트로 쓰였다는데 모형과 사진만 봐도 끔찍하다. 내부는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리모델링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구) 군산세관 본관

1908년 건립. 지금은 호남 관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월요일에 가서 내부 구경은 하지 못했다. 구 한국은행 본관, 구 서울역사와 더불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하는데 건물 규모는 다른 두 개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뒷쪽에 떨어져 있는 세관 창고는 현재 카페 (인문학창고 정담)로 사용 중. 여기는 상업 시설이라 오픈했지만 들어가진 않고 외관만 봤다. 그러고보니 군산에 창고를 고친 카페가 꽤 있다. 내가 이번에 간 곳은 카페 미곡과 올드브릭.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한일합방 이전에 지어진 은행 건물.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돈을 갚지 못하면 땅을 빼앗이 일본인에게 되파는 수법으로 조선의 땅이 일본화 되게 만드는 데 앞장 섰다고 한다 (출처: 2020군산문화재야행 유튜브). 18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은 은행이다. 지금은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월요일은 휴관이라 관람을 못 했고, 화요일 오전에 갔더니 전시회 준비 중이라고 오후에 오픈한다고 해서 관람을 못 했다.
동국사

1913년에 건립된 사찰. 등록문화재 64호. 일본 승려가 군산에 와서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다. 지붕의 기울기가 한국식 절과는 달리 매우 가파르고 울긋불긋한 단청도 없다. 경내에 일본 불교계에서 보낸 사과문이 있고 그 앞에 소녀상이 서 있다. 1970년에 동국사로 개명. 공식 홈페이지: http://www.dongguksa.or.kr/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

미곡상이자 대지주였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1920년대에 지은 주택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등록문화재 183호. 일본식 주거 양식에 서양식 응접실과 한국식 온돌을 결합하여 지었다고 한다. 내부는 개방을 안 하고 외부만 개방을 하고 있다. 항구 근처인 이 동네는 일제 시대, 일본 부유층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인들은 산 위로 밀려나 선사시대에나 볼법한 집에 살았단다.
남쪽을 향해 일본식 정원을 두고 대형 유리창을 낸 것이 인상적이다. 지금은 일반에 개방을 해 놓고 아무도 안 사는 것 같은데 집의 원래 목적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하긴 누가 살고 있다면 나는 관람을 못 했겠지. ‘장군의아들’, ‘타짜’ 같은 영화도 찍었다고 한다.
(구) 조선운송주식회사 사택
1930년대 단층 목조 주택. 등록문화재 725호. 이 곳은 공개를 하지 않은 곳이라 담너머로 일부분 밖에 볼 수가 없었다 (왼쪽 사진). 담너머로 봤을 때는 일본식 건물과 양옥이 붙어있는 형태였다. 근데건축박물관에 가면 모형(오른쪽 사진)이 있고 이 유튜브에서 좀 더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유튜브의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현재도 소유주가 살고 있다고 한다.
(구)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중국집 찾다가 본 건물로 월요일이라 입장하지는 못 했고 현재 어떤 용도로 쓰는지도 확인을 못 했다. 건물 외관의 타일 때문인지 서울 명동에 있는 명동예술극장이 떠올랐다. 등록문화재 600호.
“조선식량영단”은 1943년 일제가 식량 통제를 목적으로 설립한 반관반민 단체로 일제 말기 전시 체제 아래에서 국가에 의한 체계적인 식량 관리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군산 출장소 건물도 1943년에 지었다고 한다 (출처: 디지털군산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튜브에서 문화해설사의 소개도 볼 수 있다. 위 사진과 유튜브 영상 첫 부분에 나오는 최근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내가 찍은 위 사진은 영상 1:21 쯤 나오는 과거 사진의 모습과 흡사하다.
마리서사

걷다가 발견한 작은 서점. 검색해보니 1920년대 지은 적산가옥을 고쳐 만들었다. (출처: 동네서점) 작은 간판이 감각적이다. 오픈 전이어서 들어가보진 못 했다. 공식 사이트: 마리서사 인스타그램
호텔 항도

술집 찾아가다가 본 호텔(?)로 앞서본 건물들 만큼은 아니겠지만 오래된 건물로 보인다. 조경용 나무 때문인지 일본 냄새가 난다. 총독부 영빈관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군산에도 총독부가 있었나 싶다. Since 1950이라고 돼있는데, 호텔 영업은 1950년부터라도 건물은 그 이전부터 있었을 듯하다. 둘째날은 여기에 묵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주차가 힘들 것 같아 포기했다. 공식사이트: http://www.hangdojang.com/
화담여관
1932년에 지어진 목조주택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 1970-1980년대에는 군산에서 제일 유명한 여관이었던 ‘천안여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출처: 스테이폴리오). 리모델링 과정은 이 블로그에 있다.
여행 둘째날 여기 묵었다. 내가 묵었던 1층은 일반적인 형태의 방이었는데 2층은 다다미가 깔린 방인 것 같다. 공식사이트: https://hwadaminn.modoo.at/
사가와 가옥

길을 걷다가 본 집으로, 다른 곳과는 달리 관리가 잘돼 사람 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던 일본식 가옥이라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사가와 가옥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일제시대 전당포였단다. 사가와는 금고 브랜드 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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