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맞이한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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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2023년의 말일에 홍콩 여행을 가게 됐다. 홍콩 빅토리아 항구에서 펼쳐지는 새해 맞이 불꽃놀이가 꽤 유명해서 이 기회에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숙소도 이를 위한 최적의 위치인 침사초이에 있었다.

2023년 12월 31일 낮 1시, 홍콩으로 날아가 침사초이에 있는 YMCA 솔즈베리 Salisbury 호텔에 도착했다. 이때도 벌써 경찰이 배치되어 거리를 통제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밤에는 엄청난 사람이 몰릴 것이란 걸 눈치채지 못했다.

12/31 저녁 나의 행보: 숙소 → 딤딤섬 → 1차 통제 → 2차 통제 → Ned Kelly’s Last Stand

저녁 7시 반 쯤, 호텔을 나와 저녁을 먹으러 북쪽으로, 즉 불꽃놀이를 하는 바다와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이미 차도는 막혔고 차량에 대한 통제가 시작됐다.

저녁 7시 반 쯤 상황

밤 9시 쯤, 죠단 딤딤섬에서 밥먹고 돌아올 때는 사람의 이동까지 통제하고 있어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묵는 YMCA호텔로 가기 위해서도 호텔 투숙객임을 증명해야 했다. YMCA호텔 로비는 남쪽과 북쪽에 문이 있는데, 북쪽문으로 들어가서 남쪽문을 통해 바닷가쪽으로 나가려고 시도해 봤지만 이미 폐쇄돼 있어 실패했다. 하긴 이 정도도 생각 못 하진 않았겠지.

저녁 9시 쯤 상황

불꽃놀이를 포기하긴 싫어서 다시 로비를 나섰지만 경찰의 차단에 바닷가쪽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페닌슐라 호텔 뒷 골목에서 통제에 갖힌 채 살펴보니 경찰이 전체 도로를 N개의 셀로 나눠서 관리하고 있었다. 바닷가 쪽 셀의 사람이 줄어들면 근접된 셀의 사람들을 밀도가 낮은 다음(?) 셀로 이동시켰다.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 압사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한 통제로 나도 모르게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다. 나는 페닌슐라 호텔 뒷골목에 갇혀있다가 바리케이트가 치워지며 좀 더 바닷가에 가까운, 페닌슐라 호텔과 쉐라톤 호텔 사이 네이던 로드의 셀로 한 번 이동했다. 바리케이트를 풀어주던 잘생긴 홍콩 경찰관은 ‘겨우 200m 가는거다’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앞쪽으로 달려갔다. 셀에 갖혀 대기하는 동안 누군가가 콘돔에 바람을 넣어 군중 위로 띄웠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콘돔 풍선을 토스하며 앞으로 전달했다.

저녁 11시 쯤 상황. 네이던 로드에 갇혀 있었다.

밤 11시, 새해 카운트 다운 전에 하는 작은 불꽃 놀이가 있었지만 항구 쪽 건물에 가려 불꽃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미 2시간 넘게 길에 서 있는 상태였는데 1시간을 더 서 있어도 새해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불꽃놀이를 포기하고 술집이나 클럽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밀집된 사람들을 탈출했다. 마침 5분 거리에 재즈 라이브 연주가 있는 펍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이렇게 찾은 곳이 네드 켈리스 라스트 스탠드 Ned Kelly’s Last Stand. 손님으로 가득찬 공간이었지만 내 몸 하나 앉을 구석 공간은 있었다. 모르는 분들과 테이블을 쉐어하는 자리. 그런데 이 술집이 대박이었다. 밴드의 연주가 너무 신났다. 0시 되기 5분 전쯤에는 직원들이 손님들에게 왕관, 꼬깔모자, 뿔피리 등등을 나눠준 후, 2024되게 10초 전부터 다 같이 새해를 카운트다운을 했다. 그리고 2024년이 되는 순간, 외국에서 새해에 부른다는 Auld Lang Syne1을 들을 수 있었다. 송구영신의 의미가 담긴 것 같다. 그 이후엔 다시 밴드가 신나는 곡들을 연주하면 손님들은 같이 노래하고 춤췄다. 아마 내 인생의 가장 즐거웠던 새해맞이였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곳을 참 좋아한다. 아틀란타의 스윗조지아주크조인트 Sweat Georgia Juke Joint , 푸켓의 뉴욕라이브뮤직바 New York Live Music Bar, 싱가폴의 더펌프룸 The Pump Room, 정자동의 에릭스펍 Eric’s Pub. 모두 라이브 음악이 있고, 맥주가 훌륭하고, 분위기 좋으면 자연스럽게 춤추는 곳. 나이 50이 돼서야 내 취향을 깨달았구나. 어쨌든 불꽃놀이를 놓친게 아쉽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다.

2024년 새해 카운트다운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연주.

네드 켈리스 라스트 스탠드에 대해 찾아보니 50년 이상 같은 자리에서 주인이 바뀌지 않은 채 영업한 재즈바라고 한다1. 연주하는 밴드는 하우스 밴드라고. 새벽 1시 반까지 공연을 즐기다 숙소로 돌아왔다. 이렇게 새로운 한 해가 즐겁게 시작됐다.

  1. 우리에겐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야”로 시작되는, 졸업식에서 많이 부르는 곡. ↩︎
  2.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기사: https://www.scmp.com/lifestyle/food-drink/article/3203879/last-one-standing-50-years-ned-kellys-legendary-hong-kong-bar-and-jazz-venue-celebrated-sty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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