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E&M 뮤지컬 패널로 활동하면서 뮤지컬 스칼렛핌퍼넬에 대해 이리저리 알아볼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직후를 배경으로 활약하는, 신분을 감춘 영웅의 이야기로, 케치프레이즈는 “숨겨진 비밀, 그 안의 위태로운 사랑”. 이런 작품이 코미디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같은 작곡가(프랭크 와일드혼)의 작품인 지킬앤하이드나 몬테크리스토와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킬처럼 어둡진 않더라도 몬테크리스토처럼 우아하고 진지한 내용일 것이라고.
얼마나 진지한가, 이 포스터.
그런데, 이 작품, 코미디이다. ‘쓸데없이 고퀄’이란 단어가 생각날 정도로 고급스러운 무대를 배경으로 찌질하게 웃긴다. 몇년 전 신시컴퍼니에서 음악극으로 올렸던 ‘베로나의 두 신사‘가 떠오르기도.
영국 귀족 퍼시(박광현)와의 결혼으로 가수 생활을 은퇴하는 마그리트(김선영)가 파리의 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는 장면으로 극은 시작한다. 프랑스 혁멱 세력의 시민 쇼블랑(에녹)은 은퇴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극장을 폐쇄하고 마그리트를 협박해 얻은 정보로 숨어있던 귀족을 잡아 단두대에서 처형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무거운 내용이었다.
퍼시와 마그리트는 영국으로 건너가 결혼식을 올린다. 여기서 퍼시는 친구인 프랑스 귀족의 은신처를 알려줘 처형당하게 한 배신자가 신부 마그리트라는 걸 알게 된다. 이 때문에 퍼시는 마그리트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다른 영국 귀족들과 함께 위기에 처한 프랑스 귀족들을 구출하는 비밀 결사를 만들고 자신을 ‘스칼렛 핌퍼넬’이라고 칭한다.
이때부터 공연은 코미디가 된다. 급반전!
퍼시와 친구들은 비밀 결사임을 숨기기 위해 바보+한량인 척 하는데, 정치에 관심 없고, 용기 없고, 패션에만 신경을 쓰는 게이인 척 한다. 좀 뜬금 없었다. 아내의 배신에 실망해 마그리트의 손 끝 하나 안 건드린 걸 생각한다면, 게이 연기가 개연성이 있긴 하다.
이 영국 귀족들로 구성된 비밀 결사가 프랑스 귀족들을 구하는 장면은 어영부영 넘어가는 코미디로,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의 복수 장면보다 허무하다.
이런 류의 작품은 정체를 숨긴 주인공 스칼렛 핌퍼넬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하이라이트가 돼야 하는데, 마그리트와 쇼블랑에게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은 허무할 정도로 우숩다.
이런 코믹한 내용 탓에 마지막 장면인 남녀 주인공의 진지한 사랑 회복 씬에서는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주인공 박광현씨는 한량 귀족 연기를 꽤 잘 했다. 다만 노래가 아주 많이 아쉬웠다. 상대역인 김선영씨의 성량이 워낙 크다 보니 더 초라했다. 같은 역을 나눠 맡고 있는 박건형씨와 한지상씨 훨씬 나을 것 같다. 다만 이 두 배우가 이 공연에서 노래만큼, 혹은 노래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코미디 연기를 얼마나 잘 살릴지는 잘 모르겠다.
쇼블랑 역의 에녹씨는 예상과는 달리 아주 시원시원하게 노래했다. “Falcon in the dive”, “Where is the girl” 아주 멋졌음. 같은 역에 더블캐스팅 된 양준모씨를 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김선영씨와 에녹씨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때는 박광현씨가 무대에 나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남자주인공이 아쉬웠다.
스칼렛핌퍼넬 미니콘서트. 에녹의 “Where is the Girl”. (출처: 토로님 블로그)
김선영씨는 노래로 감정을 전달 하는데 탁월해 마그리뜨의 심정이 나에게 잘 전달됐다. 다만 배역에 비해 나이가 많은 게 아쉽다. 극 내용을 보면 김선영씨가 맡은 마그리트는 20대에서 30대 사이로 추정되는데, 나랑 동갑인 김선영 배우가 맡기에는 너무 어린 역이었다는 생각. 바다씨는 잘 어울릴 것 같다. 선영씨보다 나이도 어리지만 목소리도 어린 톤.
제작발표회 영상. 박광현, 바다의 “You are my home”. 김선영씨보다 바다씨와 훨씬 잘 어울리는 박광현씨. (출처: KBS TV 특종 박재환)
공연장인 LG아트센터는 공연에 비해 너무 큰 무대가 아닌가 싶다. 무대의 폭은 적절히 맞춰 썼는데, 너무나 높은 LG아트센터의 무대 윗 부분은 허전하게 느껴졌다. 무대 장치보단 의상에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다. 2막 처음의 가면무도회씬을 포함한, 많은 장면들의 고전적 의상들이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프랭크 와일드 혼의 음악은 귀에 익지 않았지만 인터미션과 공연 직후에는 입으로 흥얼거릴 정도의 중독성은 있었다. 역삼역 플랫폼에 도착하면서 잊혀졌지만.
1막에 마그리트가 무심한 퍼시를 생각하며 부르는 “When I look at you”는 프랭크 와일드 혼의 다른 작품 ‘지킬 앤 하이드'(이후 ‘지킬’)의 “Once upon a dream”의 느낌이다 (특히 마지막이). 지킬의 “Onece upon a dream”은 한국에서 지킬이 공연을 하기 전 CM송으로 들었던 곡이라 공연 이후에도 계속 기억에 남은 반면, “When I look at you”는 공연에서 김선영씨가 노래할 때만 인상적이었던 게 다르달까. (아래 영상을 몇 번 보면 이 곡도 계속 머리에서 맴돌게 됨)
제작발표회에서 김선영씨가 부르는 “When I look at you”. (출처: KBS TV특종 박재환)
미니콘서트에서 바다씨가 부르는 “When I look at you”. (출처: 토로님 블로그) 반주자는 프랭크 와일드 혼.
하여튼, 예상과는 다른 가볍고 경쾌한 작품이었다. 무게감 있는 배우들이 나왔지만 내용은 가벼운 게 아쉬웠다. 하지만 진지하리란 기대 없이 봤다면 아쉬움은 덜 했을 것이다. 기대했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무척 많이 웃으며 봤다. 함께 본 아내는 나보다 더 좋게 본 것 같다. 재미있었단다. 하긴, 여름엔 이런 공연을 봐야지.
내용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이 허술하지만, 앙상블도 좋고, 의상과 무대 장치도 좋았다. 음악도 평균 이상. 박광현씨의 노래만 좀 더 나았으면 더 좋은 공연이었을 것 같다.
인터미션 때 위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순간, 오버추어에서 같이 일하던 분을 만났다. 깜짝 놀라 인사하고 명함 교환하느라 사진찍으려고 줄서서 대기하시던 뒷분들 생각을 못하고 민폐를 끼쳤음 ㅠㅠ. 혹시 이 글 보고 계시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2013-07-10 오후 8:00
LG아트센터 1층 10열 5번
VIP석 CJ E&M 뮤지컬 패널 초청
몬테 복수 장면은 점점 정교해지고 조금씩 길어지고 있어요. 첫해 땐 정말 응? 뭐 저래했는데, 그런 말이 많았던지 해마다 조금씩 길어져서 점점 그런대로 구체적이 되어 가고 있고요..올해 몬테는 드디어 그 화음도 안 맞고 좀 뜬금 없다 느껴졌던 알버트와 발랑틴의 듀엣곡도 하루하루죽어가의 변주로 바뀌면서 훨씬 나아졌어요. 진화하고 진화해서 완전체가 되어 가는 느낌?ㅎㅎ 다만 류몬테의 지옥송을 지방 공연 정도에서밖에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네요.ㅠㅠ (여기서도 안 올라가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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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들이 모두 ‘스팸’으로 인식되는 문제가 있네. 일단 스팸함에 들어가 있는 네 답글은 살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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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어딘가 저장되어 있었군요!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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