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더리퍼 – 김법래, 민영기 배우의 노래가 파워풀 했던 공연

며칠 전에도 ‘또’ 돌던 도시괴담 하나.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해산물을 추천하며 냄새 한 번 맡아보라고 해서 맡으면 그대로 기절. 다음날 장기 적출돼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얘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인데 이와 비슷한 괴담이 과거 런던에도 있었나보다. 실제로 살인 사건이 있었으나 범인과 동기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었을 터. 그 괴담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가 잭더리퍼 (Jack the Ripper). 리퍼(Ripper)는 칼로 몸을 찣는 살인광이란 뜻의 무서운 단어다.



[영상:YouTube 오픈리뷰채널] 충무아트홀 지붕을 뚫을 듯 한 민영기씨의 노래

[스포일러 있음] 비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밤, 넋이 빠진 상태의 수사관 앤더슨(민영기)이 사무실로 돌아오며 공연은 시작된다. 이내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며칠 전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런던의 매춘부가 여럿 죽었다. 특종을 노린 기자 먼로(김법래)와 딜을 하고 범인을 쫓지만 소득이 없는 상태. 갑자기 살인 현장에 미국인 의사 다니엘(안재욱)이 나타나 범인은 잭이라고 외치며 새로운 상황으로 돌입한다. 다니엘에 의하면 그가 잭(신성우)이란 악당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글로리아(오진영)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장기를 구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잭이 살인을 했다는 것. 앤더슨은 다니엘의 말에 따라 잭을 잡기 위해 친구인 폴리(백지영)까지 끌어들여 함정 수사를 펼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알고보니 잭은 다니엘의 마음 속에 있는, 마치 지킬 속의 하이드 같은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

예상했던 반전이지만 흥미로웠다. 두 사람이 다른 인물이라고 가정하고 진행됐던 모든 일들을 생각해보면 어차피 모두 다니엘의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잭, 혹은 다니엘의 방화로 죽을 뻔 한 글로리아가 다시 다니엘과 함께 지내는 것은 어떻게 봐야할까? 목숨을 구하기 위한 희망을 놓치 못하여 다니엘의 정체를 알면서 그러는 것일까? 글로리아는 다니엘의 방화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후에 다니엘이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것 얘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쨌든 앤더슨은 다니엘의 잔인한 연쇄 살인이 대중들에게 연민을 얻어 사람들이 다니엘을 용서하는 것이 두려워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고 사무실로 돌아간다. 공연 시작 씬이 바로 이 이후의 씬으로 동일한 씬이 무대에서 재연된다. 공연의 처음과 끝이 똑같다. 극 중에도 이처럼 현재와 과거가 맞물리는 장면 (다니엘이 잭이 범인이라고 외치는 씬)이 있었는데, 재미있는 연출이다.
잭더리퍼의 음악을 전혀 모른 상태로 갔는데 귀에 익지 않은 곡들은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역시 뮤지컬은 음악이 좋아야 하는데… 하고 있었는데 귀를 사로잡는 남녀 듀엣이 나왔다. 끔찍한 살인 이야기 속에 싹튼 사랑 이야기. 바로 다니엘과 글로리아의 말랑말랑한 러브 테마. 그런데 안재욱과 오진영 목소리가 너무 안 어울려 완전 실망. 내가 중창을 참 좋아하는데 완전 실망했다. 그러다 1막 마지막 즈음 남자 주인공들의 3중창이 나오는데 박력이 넘쳤다. 민영기, 김법래, 안재욱씨, 훌륭했다. 이렇게 1막은 멋지게 마무리 됐다. 음악적인 면으론 이 씬이 공연 전체에서 최고. 스릴러를 싫어하는 편이라 긴장이 고조되는 부분에선 그다지 즐기지 못하면서 공연을 봤다. 보는 내내 뮤지컬 지킬과 하이드와 오페라의 유령을 짬뽕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상:YouTube 오픈리뷰채널] 목소리가 안 어울렸던 안재욱, 오진영의 러브테마곡
가장 좋았던 건 김법래씨의 목소리. 민영기씨도 상당히 좋았지만 역시 김법래씨가 내 취향이다. 참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노래를 하시는 배우. 국내에서 이 파트를 이렇게 잘 하는 배우는 김법래씨가 유일하다. 아내는 민영기씨 칭찬을 했다. 김법래씨의 묵직한 목소리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란다. 지킬과 하이드 때도 그랬지만 우리 부부의 취향은 서로 다르다. 어쨌든, 김법래 – 민영기 페어, 정말 좋다. 최고다.
한류스타 안재욱씨는 무난히 제 몫을 한 편. 신성우씨는 자신의 옷을 입은 것처럼 껄렁껄렁한, 살인을 장난으로 하는, 잭에 잘 어울렸다. 신성우씨를 무대에서 본게 오래 전의 드라큘라 때였는데, 좀 노쇄한 느낌은 들지만 ^^ 그 훤칠한 키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더블 캐스팅 된 이건명씨가 그 역을 어떻게 소화했을지는 상상이 안간다. 글로리아 역을 한 오진영씨를 볼 때면 희한하게 최정원씨가 떠올랐다. 오진영씨를 무대에서 몇 번 봤지만 최정원씨가 떠오른 건 처음. 최정원씨가 지킬앤하이드에서 입고 나왔던 붉은 치마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멀찌감치에서 볼 때 외모부터 노래하는 자세 등등이 비슷했다. 안재욱씨와 듀엣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 가장 크게 아쉬웠다. 남경주씨가 필요하다 (응?).
전체적으로 음악에는 매력을 못 느꼈지만 스토리라인은 긴장감이 넘쳤다. 다만 반전이 있었을 때 모든 것이 꽤맞춰지는 ‘아하!’란 느낌 대신 앞 내용이 미심쩍어지는 ‘뭥미?’란 느낌을 받은 건 에러. 탄탄한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엔 점수를 줄 만하다. 다만 몇몇 배역은 트리플 캐스팅을 넘어 쿼드러플 캐스팅이어서 배역에 대한 느낌은 캐스팅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급히 예매한 티켓이라 가격에 비해 안좋은 좌석에서 본 것이 아쉽다. 배우들 – 특히 안재욱 – 의 티켓 파워가 엄청나서 좌석 점유율이 높은가보다.

먼로기자 역은 이정열씨가 아니라 김법래씨인데 이렇게 돼 있었다. 예전에도 한 번 이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이 쉬운 걸 제대로 못하는지 모르겠다. 인터미션 땐 제대로 고쳐져 있더라.
  • 작곡: Vaso Patejdl
  • 작사: Ivan Hejna
  • 연출: 왕용범
  • 음악감독: 이성준
  • 안무: 서병구
2011년 8월 4일 8:00 p.m
충무아트홀 대극장 1층 8열 31번
R석 직장인할인20% 80,000원
뮤지컬 잭더리퍼 공식 홈페이지: http://www.jacktheripper.co.kr/

“잭더리퍼 – 김법래, 민영기 배우의 노래가 파워풀 했던 공연”의 2개의 생각

  1. 전 두 번 봤는데, 두 번째 보니 음악도 더 귀에 잘 들어오고..괜찮더라고요. 다만 폴리의 노래는 여전히 좀..ㅎㅎ너무 신파스럽달까. 그런데 한 가지, 제가 생각할 땐 잭 자체가 상상속의 인물이 아니라, 정말 있었는데-그래서 글로리아가 잭의 방화에 화상을 입은 것도 현실인데, 극을 보면 그 직후(글로리아네 불을 지른 직후)에 잭이 총에 맞아 강물에 빠졌다는 장면이 나와요. 그리고는 한동안 살인이 없었고..거기까진 진짜 잭이고, 미국서 오랜만에 다니엘이 영국에 왔다가 우연히 글로리아를 다시 보고, 글로리아를 위해 시체를 구하려는 절박한 마음에 그때부터 뭔가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어요. 진짜 잭은 1막에서 강물에 빠져 죽(?)고, 말하자면 2막, 다니엘의 두 번째 영국행 이후의 살인이 잭이라는, 전에 자기가 봤던 살인자를 환상속에서 재현한 다니엘의 살인인 거가 맞는 듯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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